보통 이하의 것들

🔖 역사적인 것, 중요한 것, 시사적인 것을 파악하는 데 급급하느라 본질적인 것을 제쳐두어선 안 된다. 진정으로 참을 수 없는 것, 진정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 말이다. 진짜 스캔들은 갱 내 가스폭발이 아니라, 광산에서 행해지는 노동이다. 진짜 '사회적인 불편함'은 파업 기간 동안의 '시급한 사항들'이 아니라, 견디기 힘든 하루 스물네 시간,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이다.
(...)
익숙한 것에 대해 질문해 보자.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미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에게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 익숙한 것 또한 우리에게 질문하지 않으며 딱히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지도 않다. 마치 익숙한 것은 어떤 질문이나 답도 전하지 않고 아무런 정보도 지니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채 그것과 함께 살아 간다. 그것은 더 이상 삶의 조건조차 되지 못하며, 일종의 무감각 상태 같은 것이 된다. 우리는 생애 동안 꿈도 없는 잠을 자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생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에 우리의 육체가 있을까? 어디에 우리의 공간이 있을까?
어떻게 '평범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어떻게 그것들을 더 잘 추적하고 수풀에서 끌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들을 끈끈하게 감싸고 있는 외피에서 떼어내고, 그것들에 하나의 의미, 하나의 언어를 부여할 수 있을까. 마침내 그 평범한 것들이 자신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인류학을 구축하는 일일 것이다.

🔖 동일한 인물이 동일한 장소와 위치에서 묘사하지만, 시간대에 따라 똑같은 대상을 전혀 다른 것으 로 파악하거나 다른 형태 혹은 색상으로 기술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시선의 근본적인 한계와 불완전한 지각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그 어떤 객관적 묘사도 모종의 주관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아울러, 이 글은 페렉이 즐겨 시도했던 '계열적 글쓰기'의 한 유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페렉은 모든 글쓰기는 결국 이전 글쓰기에 대한 반복이자 차이라고 간주하면서, 일탈과 모순의 요소들을 통해 끝없이 글쓰기를 이어가고 증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텍스트 안의 텍스트 형식인 이 글은 작가가 원한다면 매번 '그래프용지' 또는 '모눈종이'에서 다시 묘사를 시작하면서 작은 차이들과 함께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 그가 보기에, 현대인들은 모두 일종의 '일상적 실명cecite quotidienne' 상태에 빠져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고, 우리의 삶을 이루는 진짜 요소들을 지각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페렉에 의하면, 일상적 실명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글쓰기를 통해 '현재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있는 것, 거기에 정박되어 있는 것, 지속적인 것, 저항하는 것, 거주하는 것"이 되고, "사물과 그 사물에 대한 기억이, 존재와 그 존재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열두 개의 삐딱한 시선>).

🔖 장소의 상실은 그곳에 기반을 둔 '삶의 상실'을 야기하고, 냉혹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결국 '기억의 상실'로 이어진다. 페렉의 끈질기고 세밀한 기록들은 바로 이 기억의 상실을 지연시키기 위한, 혹은 망각에 맞서기 위한 안타까우면서도 비장한 노력이다. 다시 말해, 페렉의 글쓰기는 그 자체로 '애도'의 행위다.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묘사가 무덤덤하면 할수록, 장소를 바라보는 그의 복잡한 심정이, 숱한 기억과 감정이 뒤섞인 내면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 전달된다. 또 단조롭게 나열되는 문장들의 형태가 불완전하면 할수록, 파괴되고 사라져가는 어느 거리의 쓸쓸한 풍경이 더 생생하게 부각되어 우리 의 눈앞에 펼쳐진다.